역사 이야기

백제시대 왕실의 장례 의식을 치룬 장소 정지산 유적

수촐스 2022. 5. 11. 18:00

1996년 충청남도 공주에서는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공주와 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1995년 3월 하순에 착공한 뒤 공주 시내를 관통하는 구간까지 공사를 마친 상태였고, 금강을 건너는 백제 큰 다리 교량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지산을 깎아내고 그 위로 연결 도로를 건설하면 주요 공사를 마무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이 다수 수습됐습니다. 정지산 정상에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1996년 초부터 발굴조사를 시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와더미와 연꽃무늬 수막새를 확인했습니다. 또한 정지산 정상에서 수많은 기둥 구멍과 건물터로 추정되는 유구와 구덩이도 찾았습니다. 이는 이전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적이 없던 매우 특이한 구조였기 때문에 발굴을 진행하던 담당자들도 매우 놀랐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이 유적의 무조건 보존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시공사는 도로가 정상을 지나는 대신, 정지산 아래에 터널을 뚫어서 도로의 경로 변경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절충안이 정해졌습니다. 1998년 완공하려고 했던 백제큰길은 예정보다 4년이나 지난 2002년에 개통되었습니다.

 

 

과연 정지산 유적은 어떤 용도의 건물이었을까?

정지산 유적이 웅진백제기의 유적지 중에서 매우 독특한 시설이었으리라는 증거는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건물터의 특이한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정지산 유적은 건물을 세우기 전에 원래 들어서 있던 움집터 등을 철거하고 산 정상을 인위적으로 깎아내어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유적 가운데 기와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조사 이전부터 약간 볼록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서 다량의 기와가 수습됐습니다. 보통 건물을 지을 때는 지반을 평평하고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을 하기 마련인데, 정지산 유적의 기와 건물터에서는 그런 모습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건물터의 구조도 매우 특이해서 주춧돌이 없이 암반층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기둥을 박아 세운 형태가 남아 있었습니다.
궁궐이나 관청 등이라고 보기에는 건물터 크기가 가로 8미터, 세로 6.4미터 정도로 작았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작은 건물터에 기둥만 약 40여 개가 3열로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기둥이 너무 빽빽해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거주지로 매우 부적합한 구조였다는 의미입니다.

정지산 유적에는 기와건물터외에도 건물의 흔적이 일곱개나 더 발견됐습니다. 그중 두 채는 기와건물터 뒤에 나란히 세워져 한자로 品 (품) 자의 형태를 이루며 울타리 안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기획해서 대규모로 건물을 건축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일곱개의 건물은 지어진 방식도 특별했습니다. 네모반듯하게 도랑을 파고 그 안에 나무 기둥을 세운 다음, 사이사이를 흙으로 메워 벽을 만들고 지붕을 세우는 방식으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건물 내부에 추가로 기둥을 더 세우지 않고 벽의 힘으로만 건물과 지붕을 지탱하는 건축 형태를 벽주 건물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고 돌과 나무, 철 등을 이용해서 건물 곳곳에 기둥을 세워 하중을 분산하는 일반적인 건축법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공주, 부여, 익산 등과 같은 웅진사비의 주요 도시에서는 벽주 건물이 종종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에는 이런 방식을 잘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백제의 특징적인 건축양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건축양식은 고대 일본의 중심지였던 나라, 오사카 지역에서도 발견됩니다. 백제는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며 기술을 전해줬는데, 아마도 이때 건축양식이 백제인들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백제시대의 제례 시설

정지산 정상에서 그곳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몇 가지 수습됐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단서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연꽃무늬 수막새입니다. 연꽃무늬 수막새는 앞면에 여덟 장의 연꽃잎이 그려진 기와로 지붕의 처마 끝을 마감할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연꽃무늬 수막새는 아무 집에나 만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백제시대에는 궁궐이나 절, 기타 중요한 건물의 지붕에만 이 연꽃무늬 수막새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지산 유적에서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했다는 것은 그곳에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유적지 곳곳에서 다양한 토기를 발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릇받침과 세발토기, 뚜껑이 있는 접시, 술잔, 흙으로 빚은 등잔 등이 그것입니다. 장구 모양으로 생긴 그릇받침도 총 17점 정도 출토됐는데, 일반 가정에서 쓰는 모양으로 볼 수 없는 그릇받침으로 제사와 같은 특별한 의례에 사용하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이 그릇들이 온전히 남아 있기보다는 인위적으로 깨트린 채 남아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옛날에는 제사를 지낸 다음에 제사에 사용된 그릇을 모두 깨버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릇이 다양하게 발견된 것 외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생산지가 전북 고창, 전남 나주, 경북 고령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에서 제작된 토기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지역에서 생산된 그릇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은 특정한 행사가 열릴 때, 가령 빈소에 조문하러 왔을 때 가져온 선물이나 지역 특산품 등을 담아온 그릇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령왕릉 지석을 통해 풀린 정지산 유적의 수수께끼

2006년에 사적 제474호로 지정된 정지산 유적의 용도는 흥미롭게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매지권에는 526년 12월에 '유지'에 가매장했다가 529년 2월에 합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무려 27개월 동안 그곳에서 시신을 보존했다는 의미이므로 시신을 잘 놓아두고 보존할 시설을 정지산 정상에 지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지산 유적이 무령왕비의 제의 시설로 추정되는 근거는 발굴 과정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정지산 꼭대기에서 발견된 유구 중에서 모서리가 둥근 네모 모양으로 파인 넓은 구덩이가 여러개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구덩이가 아니라 그 안에는 작은 구덩이가 더 파여 있고, 땅속으로 터널을 내어 배수시설처럼 만든 구덩이입니다. 이를 통해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설이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위치상 정지산은 금강 바로 옆에 있어서 겨울철에 금강이 얼면 얼음을 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한 얼음을 구덩이에 넣고 볏짚이나 왕겨 등으로 그 위를 덮은 다음 나무로 만든 뚜껑으로 바깥공기를 차단하면 오랜 기간 녹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배수시설을 만든 이유는 얼음이 조금씩 녹아 물이 생기면 그 물로 얼음이 더 빨리 녹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물을 상시로 빼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료들을 살펴보면 백제에는 사람이 죽은 뒤 바로 묻지 않는 가매장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통신 수단은 인편이었습니다. 지방이나 외국에서 인편을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왕비의 장례에 조문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거나 대신해 누군가를 보내는 데 기본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당시 상황과 백제의 장례 풍습을 바탕으로 무령왕비를 사후에 바로 무덤에 매장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매장 상태로 뒀던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백제 웅진시대 중흥을 이끈 무령왕과 무령왕릉에 대해 알아보자.

 

백제 웅진시대 중흥을 이끈 무령왕과 무령왕릉에 대해 알아보자.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이끈 백제, 고구려, 신라. 그중에서도 백제는 한성을 거쳐 웅진, 사비로 두 번의 천도를 했습니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던 한성(지금의 서울)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sth-justlikethis.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