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동학농민운동의 배경과 최대 격전지 우금치 전투

수촐스 2022. 4. 28. 17:42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말기 부패한 관리들에 대항하여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봉기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전봉준과 현재 충청남도 공주지역에서 벌어졌던 우금치 전투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늘은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한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에서 최대 격전지였던 우금치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동학의 탄생 배경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무렵 조선 사회는 60년간 세도정치로 국가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관리들의 탐학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흉년과 질병이 겹쳐지면서 일반 백성들의 생활고가 심각해지면서 전국 각처에서는 봉건체제의 모순과 관리의 횡포에 저항하는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동학은 지속된 정치의 부패, 조세 수탈의 가중, 계급적 모순의 심화, 흉년과 질병으로 인해 불안과 고통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피지배층들에게 인간 평등을 외치며 크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동학은 기존의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 미래를 제시하면서 사회개혁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지배세력은 동학을 이단시하며 탄압을 가했고, 결국 1863년 교조 최제우가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되고 맙니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의 교세가 위축되었으나 그의 제자 최시형의 노력으로 점차 교세를 키워나갔습니다.

 

2.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근대 변혁기에서 가장 뚜렷한 자취를 남긴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로 인해 발생한고부민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무렵 제세안민의 의지를 지닌 전봉준과 같은 지도자가 나왔고, 민란의 소강상태에서 교조 신원 운동의 집회 등을 통해 결집된 동학 세력을 최대한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고부 민란은 일반 민란과 달랐습니다. 고부 미란은 동학농민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민란 직후 조병갑이 쫓겨났으나, 중앙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에 참가한 농민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에 민란 지도자 전봉준은 동학의 주세력과 연결하면서 '사발통문'에 의한 거사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때 전봉준은 무장으로 가서 동학 지도자를 만나 남도 접소를 차린 뒤 창의문을 짓고, 각 고을에 농민 전쟁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농민군이 조직되고 1894년 3월 무장에서 첫 농민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무장에서 편성된 농민군의 수는 4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단기간에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원평 집회에 참가한 세력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봉준의 남접은 동학의 조직과 활동을 종교 범주에 한정시키려는 북접과 달리 사회변혁을 위한 혁명을 접목시켜 나갔습니다.

 

3. 동학농민전쟁의 최대 격전지 우금치 전투

 

녹두장군 전봉준

공주 우금치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당시 우금치 전투에 참가한 농민군은 남북접의 연합군으로서 그 규모가 수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렇듯 남북접이 연합할 수 있었던 것에는 정세 변화뿐 아니라 농민군의 역량이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산, 금산 지역에서는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는 등 강렬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진산에서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금산으로 진출했으며, 금산 지역의 민보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농민 전쟁의 불씨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충청 서부의 서천 지역에서는 전라도 해안지방의 농민군 세력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등 남북접 간 활발한 교류를 통해 농민군의 의식을 고양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접 세력이 한산 등지로 진출하여 서천의 농민군과 연합한 뒤 부여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부여에서는 7월 경 집강소가 설치되었으며, 대일항쟁의 의식이 고조되어 갔습니다.

 


동학 교주 최시형은 농민 전쟁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9월 초 전봉준의 남접군과 논산에서 만나 남북접 연합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어 9월 18일 기포령이 내려지면서 전국 각처에서는 농민군이 일어났습니다. 남접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려군량과 무기를 확충한 뒤 서서히 북상하였고,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북접은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일대는 논산으로 향하였고, 다른 일대는 회덕으로 나아가 일본군과 관군이 옥천 지역에서 남하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4. 금강 일대의 전투 양상

금강 일대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투는 10월 9일 한밭 전투였습니다. 북상하던 전봉준의 선봉대가 영관 염도희 수하의 충청감영군을 격파한 이 전투는 동학농민전쟁의 시작을 승리로 장식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10월 12일 논산대회를 치르고 북접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공주로 진격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10월 21일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북접의 김복용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패하면서 서울로 올라가려던 북상로가 차단되었고, 오히려 이 길을 통해 일본군이 증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10월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벌어진 이인 전투는 공주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어 10월 24일 효포에서 벌어진 전투는 서로 치고받는 격전 끝에 농민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관군의 전력이 대폭 보강되면서 농민군은 열세로 돌아섰습니다. 10월 25일 옹치 전투는 서로 승부를 가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농민군이 입은 피해도 막대하여 전력에 크게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이 무렵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 부대는 금산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금산에서는 전참판 정숙조 등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항하려 했으나 김개남 부대의 대군이 이르자 민보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하는 바람에 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농민군에 생포된 정숙조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공주 인근에 주둔하던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통문을 보내어 공주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금산 점령 후 공주로 가지 않고, 청주 지역으로 북항하였습니다. 김개남이 공주 지역으로 북항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청주에서 남하하는 일본군을 막아 공주에서의 전세를 유리하게 하려는 전술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5. 우금치 전투와 농민군의 패배

금강 일대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군의 전투는 우열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혼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10월 28일 홍주 전투에서 패하여 충청 북부 지역과 잇는 연결 통로가 차단되면서 농민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1월 9일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 우금치에서는 동학농민전쟁상 최대의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공주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져 있고,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주성은 북상하려는 농민군과 남하하는 일본군 모두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당시 공주에집결한 일본군과 관군은 일본군 120여 명, 관군 800여 명이었고 이외에 감영병과 민보군이 가세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맞서는 농민군은 무려 2만에서 많게는 4만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벌어진 이 날의 전투에서 지속적인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병력의 규모에서는 농민군이 압도적이었으나 우세한 화력과 지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우금치 전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그동안 공세를 취하던 농민군이 수세로 몰리는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우금치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20일간의 공주 전투를 마무리하고 전라 지역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지속적으로 패퇴를 거듭하던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단신으로 순창으로 잠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측근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7일 나주로 압송되었으며, 이듬해 3월 처형되었습니다. 김개남과 손화중 등 다른 동학 지도자들도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반외세와 반봉건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근대변혁의 과정에서 피지배층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봉건 지배체제에서 오로지 지배와 수탈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혁명 전선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5백 년간 조선을 지배한 유교이념에서 벗어나 만인평등의 사회를 지향했습니다. 비록 일본군에 의해 패퇴하고 말았지만 이들이 전개한 혁명과 전쟁은 우리 민족의 자주와 근대화를 위한 과정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