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한반도 문화의 시발점 석장리 구석기 유적

수촐스 2022. 5. 2. 15:09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구석기 문화가 없는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구석기 문화는 일부 유럽지역과 아메리카 지역에서만 발견이 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60년대에 금강유역에서 발견된 석장리 선사유적은 어마어마한 발견이었습니다. 한반도에도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됐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역사교과서에서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한 번쯤은 배웠을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석장리 구석기 유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반도에는 구석기 문화가 없다?

지금부터 70~3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선사인들은 강가나 해안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갈돌을 뗀석기로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들은 석기를 이용하여 고기나 동물을 잡거나 열매를 따서 식량을 만들어 생활하였습니다. 석기는 돌을 이용하여 만든 도구들의 총칭으로 제작방법에 따라 뗀석기와 간석기로 나눕니다. 뗀석기가 주로 사용된 때를 구석기시대, 간석기를 쓴 시대를 신석기시대라 부르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 세석기를 사용하였던 때를 중석기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만 해도 고고학계는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입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역사보다 한반도의 역사가 앞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한반도 내 구석기시대를 입증할 유물이 나와도 무시하려 했습니다. 이런 역사 왜곡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오다가 1960년대 금강 유역의 석장리 유적이 발견되면서 구석기 문화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강 유역의 연천 전곡리, 파주 금파리, 양구 상무룡리, 양평 병산리 등에서 구석기 문화 유적이 발굴 조사되면서 구석기 문화가 정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석장리 유적은 남한강 유역의 명오리 유적, 금굴 유적, 창내 유적, 수양개 유적 등과 함께 전형적인 후기 구석기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유적의 발굴은 해안 내지 중부 내륙을 통해 남한강과 금강의 선사인이 교류하며 하나의 석기 문화권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문화

석장리 유적은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에 있는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공산성에서 금강 상류 쪽으로 5km 남짓 떨어진 석장리 마을 앞 강둑에 있습니다. 석장리는 좁은 골짜기 사이로 금강이 흘러, 강 비탈에 강가를 따라 띠 모양의 퇴적층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넓은 강변은 선사인들이 오가며 쉽게 물고기를 잡아 생활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석장리 유적의 1964년 첫 번째 발굴에서는 선사 인류의 생활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석장리 유적이 발견된 언덕은 27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중 13개의 지층에서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그것에서는 한반도 구석기시대 초기와 중기, 후기의 도구들이 골고루 발견되어 옛날 사람들이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생활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럴 만한 것이 석장리 지역은 금강의 지류가 본류와 만나는 곳이어서 식수를 구하기 쉽고 물고기와 조개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금강의 거센 물살이 끊임없이 깎고 나른 토사가 시간 순서에 따라 쌓인 덕분에 구석기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퇴적 지층이 잘 발달되어 남아 있던 것도 발굴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렇게 시기에 따라 다른 형태의 도구들이 발견되면서, 인류가 진화하며 점차 손에 더 잘 맞고 쓰임새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구석기시대 유물로는 거친 제작방식의 찍개류가 출토된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긁개류나 돌날석기같이 좀 더 날카롭고 더 많이 다듬은 유물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사용방법뿐만 아니라 석기의 제작 기술도  구석기 후반으로 갈수록 더 향상됐다는 증거가 됩니다.
석장리 발굴은 1965년 4월 2차 조사를 시작으로 1973년을 제외하고 1974년까지 매년 이어졌습니다. 추가 조사에서는 주먹도끼와 찍개 같은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어 한반도 역시 다른 동아시아나 유럽에 뒤처지지 않는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불을 땐 자리나 기둥을 세운 흔적, 문으로 쓰인 돌 등 구석기시대 집터로 보이는 유구 등도 찾아내어 구석기시대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가운데 후기 구석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배밑바닥 모양의 석기는 베링해, 알래스카, 북미 대륙 등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유형의 석기입니다. 이 때문에 석장리의 석기는 동북아시아의 선사인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했던 과정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집터는 겨울철 살림을 위한 것과 여름철에 이용하였던 것 등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특히 화덕 자리는 석장리 구석기인들이 불을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1990년과 1992년에 도로 건설을 위해 추가로 발굴 작업을 했고, 2010년에는 문화재 보호구역 확대를 위해 발굴조사를 하면서 석장리 발굴은 46년 동안 총 13차례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이렇게 조사하여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석장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석장리 유적 발굴은 당시까지 학계에 팽배해 있던 식민사관과 한국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 라는 가설을 단박에 타파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석장리 발굴 이후 국내에서 구석기 고고학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단양 수양개 유적 발굴과 제천 점말동굴 유적 발굴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더 많은 한반도 구석기 유적을 찾아내며 한반도 전역에 구석기시대가 분포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