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형성 과정
기원전 509년 에트루리아 출신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낸 로마인들은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켰습니다. 공화정은 정무관, 민회, 원로원이 서로 세력 균형을 이루며 나라를 이끌어 가는 체제입니다.
왕 대신에 선출된 2인의 고위 정무관인 콘술들은 켄투리아 민회에서 혈통 귀족 출신자들 중에서 선출되었고 1년 임기 동안 서로 협의하면서 왕이 가지고 있던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공화정 초기 귀족들의 콘술직 독점에 불만을 품은평민들이 신분 투쟁을 벌이면서 기원전 367년에 콘술직 두 자리 중 한자리는 평민 출신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평민 출신이라도 콘술직을 역임하면서 귀족층에 합류했기 때문에 로마 사회에는 혈통 귀족과 함께 새로운 지배층이 된 신귀족층, 즉 노빌리타스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민회는 정무관 선출, 입법, 사법, 중요 국사 결정권을 가진 로마인민의 총회였습니다. 정무관직의 피선거권이 혈통귀족이나 신귀족에게 독점되기는 했지만 그들을 선출한 것은 로마 인민이었기에 인민주권의 원리가 민회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원로원은 1년 임기를 마친 정무관 역임자들로 채워졌습니다. 원로원 의원은 종신적으로 재정, 외교, 사법 등 국정 전반에대해 논의했는데, 논의 결과인 원로원 결의는 비록 법적인 구속력은 없었지만 정무관들의 국정운영에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
신분 투쟁을 거치면서 기원전 3세기 말이 되면 '원로원과 로마인민'으로 표현되는 로마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 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로마 인민으로서 일체감을 강화하면서 원로원의 권위와 인민주권의 원리가 조화를 이룬 정치 체제로 발견했습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1인의 왕정, 소수의 귀족정, 다수의 민주정이 있다고 말했는데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출신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 공화정을 이 3가지 요소가 잘 배합된 혼합 정치라고 평가했습니다. 즉, 콘술 제도에서 왕정의 장점이, 원로원에서 귀족정의 장점이, 민회에서 민주정의 장점이 잘 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민회에서 구현된 인민주권의 원리나 정무관직에 부여된 임페리움이 막강한 통치권을 상징했다 해도 로마 공화정의 중심은 원로원이었습니다. 원로원은 왕정기에는 씨족장으로 구성되었고, 공화정기에 오면 고위 정무관 역임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귀족 과두체였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콘술에 의해 소집되고, 콘술에게 자문하는 기관에 불과했지만 원로원의 결의는 그 전통의 무게와 지배 엘리트 구성원들의 권위에 힘입어 사실상 국정을 주도했습니다. 카피톨리움 언덕과 팔라티움 언덕 사이의 습지에 배수시설을 설치해서 만들어진 로마 광장은 원로원과 로마 인민으로 상징되는 로마 공화정의 산실이자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공화정의 개혁과 분열
로마는 내적으로 신분투쟁을 통해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결속을 다지고 대외적으로 팽창을 거듭했지만 이탈리아 여러도시들을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동맹 체제로 연결하여 결속을 다졌습니다. 한편 기원전 9세기 말 오늘날 북아프리카에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로 팽창하면서 해상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육지와 해상에서 세력을 강화하던 두 세력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을 시작으로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충돌하여 지중해 세계의 승자를 가리는 대 접전을 펼쳤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쟁탈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칠리아는 동남부에 자리한 그리스의 식민지 시라쿠사이 일대를 빼면 카르타고의 세력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북부에 위치한 메사나에서 내부 분쟁이 일자 로마와 카르타고가 간섭하면서 양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고, 로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반도 주변의 섬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고, 로마는 지중해 세계로 팽창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서부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기원전 218년 히스파니아 주둔군 사령관 한니발이 대군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 즉 한니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2차 포에니 전쟁 초반에는 한니발 군대가 승리를 거듭했지만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국들이 대부분 로마에 대한 신의를 지켜 충성했기 때문에 로마 군대는 초반 열세를 만회하고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 만에 일어난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로써 로마공화국은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동쪽으로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정복사업은 광대한 영토와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특히 2차 포에니 전쟁 때 장기간의 군 복무로 버려진 경작지가 많아졌으며 주인이 확인되지 않은 토지나 전쟁 중에 한니발 군대로 전향한 일부 로마의 동맹국들의 토지가 몰수되어 공유지의 규모를 확대시켰습니다. 전리품과 전쟁 포로가 대규모로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노예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자본과 노동력이 로마로 집중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구매력이 증대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 계속해서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보다 안정적인 광대한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의 종군, 전쟁으로 인한 토지의 황폐,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이 무산시민이 되어 로마로 몰려들면서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영농민은 농업적인 로마 사회의 중산층이었고, 또한 로마 군대의 주력이었기 때문에 자영농민의 몰락은 군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했으며 이는 원로원과 로마 인민의 조화 속에 추진되어 온 공화정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혁운동을 전개한 것은 기원전 133년 호민관이 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였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라티푼디움 경영에 제동을 걸기 위해 농지법을 제정했고, 농지분배 3인위원회를 설치해서 공유지 보유 상한선을 어긴 토지 보유자들로부터 공유지를 빼앗아 무산 시민에게 분배하는 정책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보수파의 반대에 직면해 정치 폭락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로마는 현상유지 속에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원로원 중심의 귀족파와 평민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민중파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폭력 사태가 되풀이되는 내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
공화정의 위기에서도 원로원은 무능력하게 현상유지에 급급했고, 군대를 배경으로 한 군인정치가들의 정치적 야심은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귀족파와 민중파의 투쟁은 군인 정치가들의 권력투쟁과 결부되면서 치열한 내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마리우스는 최초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민중파였습니다. 여러 전선에서 외적을 물리친 군사적 공적에 힘입어 기원전 107년 콘술이 된 마리우스는 전통을 어기고 군복무에 필요한 재산 자격을 철폐하고 무산 시민들도 군대에 받아들여 국가에서 무장을 해주고 봉급을 지불하는 군제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 이후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병사들을 퇴역시키면서 1인당 100유게라씩의 토지를 분배해주고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등지에 정착시키는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16년간 복무한 후 제대할 때 토지를 주어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 군대는 국가보다 장군에게 더 큰 충성을 바치게 되어 군대의 사병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가 지중해 제국으로 발전하는 데는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던 동맹국들도 기여했습니다. 이탈리아 동맹국들은 외견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외교나 군사에 자율권이 없어 로마의 통제를 받았고, 특히 전쟁이 있을 때에는 외교나 군사에자율권이 없어 로마의 통제를 받았고, 특히 전쟁이 있을 때에는 군사력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시민들이 로마의 팽창에 기여한 만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결국 기원전 91-89년 동맹국들은 단합해서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만들고 시민권 개방을 반대하는 로마에 도전했습니다. 일명 동맹국 전쟁 또는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위기에 직면한 로마는 로마에 협조하는 동맹국부터 선별적으로 시민권을 수여하는 정책을 펼쳐서 전쟁을 매듭지었고 결과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자유인들에게 시민권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동맹국 전쟁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동맹국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내적인 갈등은 계속됐습니다. 귀족파 술라의 등장, 민중파 마리우스와의 내전과 술라의 독재, 폼페이우스-카이사르-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 카이사르-폼페이우스의 내전 등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로마의 공화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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