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원래 의미는 신골을 담고 토석을 쌓아 올린 불신 골을 봉안하는 묘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탑파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탑은 그 재료에 의하여 목탑, 전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 석탑 등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유물 가운데 석조 미술품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채취되는 자연적인 조건 아래에서 석탑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석탑 발생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불교를 받아들인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의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 시기로서 이 후에 석탑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목탑이 아닌 많은 석탑이 건립되었습니다.
오늘은 각 시대별 역사적인 흐름에 따른 석탑의 특징과 주요 석탑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삼국시대의 석탑
한국 석탑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전라북도 익산군 미륵사지 석탑과 충청남도 부여읍 정림사지 석탑이 유일합니다.
미륵사지 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보고 석탑의 시원을 여기에 두고 있습니다. 이 탑은 이전에 선행되었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서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부여에 남아 있는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이 목조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는 유구임은 물론이고, 각부의 양식 수법이 특이하여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이 석탑은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의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기둥 수법, 얇고 건물의 두공을 변형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 수법, 특히 낙수면 네 귀퉁이의 우동 마루형 등은 이 탑이 목탑적인 면을 보여 주는 특징입니다. 이와 같이 백제에서 건조된 2기의 석탑은 똑같이 석재를 사용하여 목탑을 모방함으로써 발생하였으므로 이 두 탑을 목탑계 석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의 석탑 발생 사정은 백제와는 달랐습니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탑의 모방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받침의 형식 등이 전탑의 양식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의 양식 발생 사적인 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석탑입니다. 이 탑은 전탑 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이 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는 전이 아니고 석재입니다.
삼국시대의 탑을 정리하면 백제에서는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되 목탑계 양식을 따랐고, 반면에 신라에서는 화강암을 혼용하였으나 안산암을 주재로 삼아서 전탑계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양국의 초기 석탑은 그 기본 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양국이 똑같이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2.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7세기 전반인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에 세워진 석탑의 초기 형태와 양식은 서로 달랐지만, 얼마 후에 두 지역의 석탑은 같은 유형의 탑으로 서로 합쳐지게 됩니다.
삼국 통일의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에서도 가장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이 경상북도 월성군의 감은사지 동, 서 3층 석탑과 경주시 암곡동의 고선사지 3층 석탑입니다. 이 두 석탑이 똑같이 새로운 통일 국가의 도읍지인 경주를 중심으로 역사적 전환을 통해 새로운 하나의 석탑 양식이 발생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초기의 석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각부의 구성이 백제시대의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곧 목조 건축의 구조성을 잃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8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신라식 일반형 석탑의 정형인 방형 평면의 기본 양식과 단일성의 중층 형식은 이후 오랫동안 지켜진 양식 수법이며 우리나라 석탑의 주류이자 특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가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조형 미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변화에서 일어난 결과라고도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당시의 사회, 정치적인 여러 가지 여건에 기인된 문제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9세기 이후 왕실 분쟁으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예술분야도 위축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따라 조형 미술품도 그 규모가 작아지고 각부 양식도 간략, 혹은 생략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장식적인 의장이 강하게 나타남으로써 전대에 볼 수 없었던 비 건축적인 장식적 석탑의 유행을 보이게 됩니다. 석탑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 의장은 한갓 재래의 전형적 석탑 외부에 장식을 가하려는 의사에 그치지 않고 석탑 그 자체의 외양에까지 특별한 형태를 나타내려 한 것인 즉, 여기서 비로소 전형적 양식 외에 특수 양식의 발생을 보게 됩니다. 그 예로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구례군 화엄사 4자사 3층 석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3. 고려시대의 석탑
고려는 신라에 대하여 융화 정책을 쓰면서 신라 전통을 이어받게 됩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신라의 것을 본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고려가 신라의 불교를 계승하여 국교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불교 미술이 성행했습니다.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불교적인 조영이 거의 전시대를 통해서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교 조영의 성황 속에 그 중심을 이루는 석탑 또한 다수 건립되어 오늘날 많은 석탑의 유례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의 석탑을 살펴보면 석탑건립이 전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석탑은 지방적인 특색을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신라시대에 있어서는 석탑에서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양식을 보이고 있음을 남아 있는 유례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개심사지 5층 석탑, 경천사 10층 석탑 등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4. 조선시대의 석탑
조선시대에는 고려 말기, 불교의 쇠퇴와 승려들의 부패 등으로 말미암은 많은 폐단은 새로운 지배 계급에 의하여 새로운 이념인 유교가 숭상됨으로서 쇠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중대한 변화는 곧 당시의 조형 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쳐 자연히 불교 조형 미술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란 때문에 오랜 전통이 대부분 단절되고, 설혹 전통이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일부에서는 변형을 일으키고 조형 양식은 크게 위축되고 맙니다.
그러나 고려말의 여세로 전대의 영향을 받은 탑을 살펴보면 양양군 낙산사 7층석탑, 여주군 신륵사 다층석탑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석탑에서는 전체적으로는 고려시대의 조형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고려의 양식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특수형 석탑 중에서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은 비록 한국 석탑 중 후대에 속하지만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여 수법이 세련되고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석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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