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흑사병

수촐스 2022. 4. 10. 18:20

흑사병은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전염병입니다. 전파력이 어느 전염병보다도 빠르게 번져나갔고 감염된 지 몇 시간 만에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치사율도 높았습니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치료방법이나 위생상태 등이 좋아져 흑사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14세기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발병되었을 때는 발병원인, 치료제 등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중세 유럽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흑사병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흑사병 이전 유럽의 분위기

 

13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럽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늘어나는 인구를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농민들은 한 뼘의 땅이라도 곡물을 더 심을 수 있는 곳이면 모조리 개간했고, 자갈투성이의 척박한 한계지까지 경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농촌 인구의 절반 정도가 생계를 유지할 만한 정도의 토지를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토지에 대한 인구의 압력과 경작지의 부족이 건초를 생산하는 목초지의 면적을 축소시켰고, 그 결과 가축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가난한 농민들은 우유와 버터를 얻기가 더 어려워졌고, 당시 주요한 거름이었던 가축의 분뇨가 줄어들어 토질이 더욱 척박해져 갔습니다.

 

 

이는 토지의 생산성 하락과 곡물 생산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당대의 상황 속에서 계속되던 인구 증가와 개간지의 고갈로 인구의 수용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1315년 대홍수에 기인한 흉작이 1317년까지 계속되면서 유럽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굶어 죽었습니다. 당시의 극심한 기아는 유럽 인구의 1/10을 앗아가며 출생률의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2. 흑사병의 발병

 

 

1347년에서 1351년 사이에 흑사병으로 알려진 선페스트와 폐패혈증으로 유럽 인구의 1/3~1/2이 사망했습니다. 단기간 내에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앗아간 흑사병은 유럽인들이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대재앙이었으며, 이후로도 경험하지 못하게 될 재난이었습니다. 환자의 팔과 다리에 나타나는 검은 반점 때문에 흑사병으로 알려진 이 질병은 중앙아시아로부터 대상의 길을 따라 감염된 쥐벼룩에의해 옮겨져, 1347년 10월 시칠리아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 남부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페인으로 퍼졌습니다. 이병은 1349년 말까지 북부 독일, 포르투갈 그리고 아일랜드에 도달했고, 다음 해에는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러시아까지 진출했습니다. 

 


흑사병은 발생하자마자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흑사병에 의하여 유럽 인구의 1/3가량이 사망했고,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실제로 피렌체와 시에나의 인구는 1348년 여름 몇 달 동안에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고, 영국의 브리스톨 인구도 1/3 이상이 줄어들었습니다. 특정 집단의 사망률은 훨씬 높았는데, 환자들과 접촉해야 하거나 집단생활을 했던 의사나 성직자들의 경우가 특히 그랬습니다. 
흑사병은 일단 유럽에 자리를 잡자 대체로 세대마다 재발되어 많은 지역에서 17세기에 이를 때까지 흑사병 이전의 인구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1348년 인구의 2/3을 잃었던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피스토이아의 경우 1389~1399년에 나머지 인구의 절반을 잃었고, 다시 1457년까지 재발되는 흑사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툴루즈의 경우 1335년 3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430년에는 80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프랑스 동부 노르망디 지역의 인구는 1347~1357년 사이에 30%가 줄어들었으며, 1380년 이전에 다시 30%가 줄어들었습니다. 유럽의 마지막 흑사병은 177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것으로 6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3. 흑사병의 증상

 

감염된 쥐벼룩에 물린 후 가래톳 페스트에 감염된 사람들은 곧 높은 열이 나며 기침을 시작했고,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의 임파선 마디가 부풀어오르면서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감염되면 대체로 5일 이내에 사망했으며, 진행이 너무 빨라 건강한 사람도 하루아침에 죽어 나자빠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공기로 전염되는 폐렴성 페스트는 대체로 3일 이내에 죽었으며, 어떤 경우는 수시간만에 죽었습니다. 혈액을 공격하는 패혈증성 페스트의 경우는 더 빨리 진행되었고 더 무시무시했는데, 일단 감염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4. 공포에 휩싸인 유럽인들의 반응

 

병의 원인과 감염 경로, 그리고 치료 방법 등 그 어느것도 알 수 없었던 당대인들에게 흑사병은 죽음의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설교자들은 죄에 대한 신성한 벌로 생각했고, 일반인들은 먹는 물에 유태인들이 독을 타서 생긴 것으로 고발했습니다.

 


유럽의 한 대학에서는 흑사병이 발생한 것은 화성, 목성, 토성의 결합에 의하여 주변의 공기가 오염된 결과라고 발표했습니다. 흑사병에 대한 대응 역시 다양했습니다. 유럽 도처에서 공포에 휩싸인 민중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심지어는 자신들에 매질하며 참회하는 무리들에 합류하여 신의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부는 자포자기하거나 또는 먹고 마시는 즐거운 생활이 어떻게든 흑사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들을 쾌락에 내던졌습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이 유태인을 속죄양으로 삼아 살육했습니다. 도시인들은 병의 원인이나 진행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감염의 위험은 알아 대문을 잠그고 외부인을 쫓아버렸습니다. 재산이 많은 부자들은 아예 시골로 도피했습니다. 

 



확실한 통계가 없기는 하나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전쟁과 기아로 인한 사망자의 수보다 많은 것으로 추측되어 집니다. 흑사병은 유럽에 떨어진 재난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쳐 이미 시작되고 있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를 촉진시켰습니다. 처음의 흑사병만으로도 사회, 경제적 구조를 부수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들판의 작업장이 방치되었으며 국제 교역이 정지되었습니다. 촌락의 유대 관계와 종교의 유대 관계, 그리고 심지어 가족의 유대 관계마저도 죽음의 공포와 앞날에 대한 회의 속에서 산산이 깨져버렸습니다. 


현재도 끊임없이 새로운 전염병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많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생겨나는 전염병에 대한 원인 및 치료제를 빠르게 알아내서 대처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인류가 살아나가면서 해결해야 할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