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당대 최고의 절대권력을 이룬 왕으로 잘 알려진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 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화려한 대례복을 입고, 붉은 휘장 아래에서 당당히 서있는 초상화 속의 모습일 겁니다.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를 보면 즉위식에서 입은 옷을 걸치고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둘러싸인 절대군주의 겉모습 이면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겉모습은 아마도 근대 초의 어느 통치자보다 인상적인 왕의 존엄성이 지닌 극적 효과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루이 14세가 용의주도하면서도 인위적으로 꾸며냈을 것입니다. 루이 14세와 후계자들은 일반인이 근접하기 힘든 신적인 권세를 부여받은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통치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주도면밀하게 연출했습니다.
루이 14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는데 그의 아버지인 루이 13세는 3살에 불과했던 루이 14세를 모질게 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1643년 루이 13세가 급서 하면서 5살이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였으며 즉위 당시에는 어머니가 섭정을 맡아 정치를 진행했습니다. 루이 14세는 23살부터 직접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베르사유 궁전이 루이 14세의 왕권강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루이 14세의 역작, 베르사유 궁전과 왕권강화
루이 14세가 자신의 통치권을 가장 공들여서 과시하고자 한 곳은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이었습니다. 1662년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공사를 시작한 베르사유 궁전은 20년에 걸쳐 공사가 이어졌고,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으로 왕실을 옮긴 뒤에도 공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건물과 대지는 루이 14세가 매일 의식을 거행하고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면서 귀족들을 복종시키려고 최면을 거는 무대가 되였습니다. 그 궁전의 정면은 길이만도 530미터 정도였습니다. 궁전 내부에는 프랑스 군대의 승리와 국왕의 개선을 기리는 벽걸이와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궁전 밖의 드넓은 정원에 있는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로 상은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태양왕' 임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루이 14세가 침대에서 일어나면 귀족들은 경쟁적으로 그를 수행했고, 앞다투어 왕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왕실의 주방에서 식탁까지 여러 블록의 거리를 운반해왔기에 대개 돌처럼 차가운 음식으로 변해 있는 음식들이었습니다. 귀족들은 왕의 정원을 산책하거나 말을 타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루이 14세의 궁정은 태양왕의 집으로서 국왕의 광채가 발현되는 중심점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주요 귀족들은 일 년 중 일정 기간을 베르사유에서 루이 14세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장엄한 궁전은 국왕과 제휴한 귀족들의 위신을 높여주는 한편, 그들이 국왕에게 불복종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루이 14세의 영지에서 귀족들은 반역을 획책하기보다 국왕의 행차가 광대한 궁정 홀을 장엄하게 통과할 때 2~3분 동안만이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정 주변의 세련되면서도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세밀한 예의범절의 규칙은 특권을 지닌 이들 귀족에게 완벽한 매너를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사소한 실수를 범해 국왕의 기분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줄곧 걱정하는 지속적 불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귀족은 생활하면서 반역 등과 같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권력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2. 행정과 중앙집권화
루이 14세는 전반적인 국내 안정을 도모하려면 왕권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귀족을 자신의 왕권 아래로 끌어들이는 한편, 상층 부르주아계급을 국왕의 행정가 특히 36개에 달하는 프랑스의 기본 행정 단위인 제네랄리테(조세 징수를 위한 기본 행정구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 장관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이들 지방 장관은 대개 자신의 출신 지역에 임명되지 않았으므로 관할 지역의 지방 유력자들과 결탁하는 일 또한 불가능했습니다. 몇몇 행정관들은 베르사유에서 국정 수행을 보좌하기도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행정관들은 세금 징수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루이의 호전적이고 대외 정책의 바탕인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에 필수적이었습니다. 17세기 전체를 통해 늘어난 타유 또는 토지세에 더해 부가세가 부과되었습니다. 여기에 루이의 정부는 카피타시옹(인두세)을 도입했으며 소금, 포도주, 담배와 그 밖의 물품에 부과하는 간접세를 철저히 징수했습니다. 그런데 귀족은 타유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만큼의 부담이 농민에게 무겁게 부과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의반란이 일어났지만 루이는 이를 어렵지 않게 제압했습니다.
지방 귀족의 반대 세력은 루이 14세의 치세 동안 줄어들었습니다. 지방 귀족을 베르사유로 이동시키으로써 루이 14세는 지방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의 근원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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