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5세기 유럽은 흑사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 및 기아와 더불어 계속되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들과 독일 제후국들, 그리고 서방의 군주국들이 서로 전쟁에 휩쓸려 중세 말 유럽인들의 삶을 더욱 황폐화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백년전쟁(1337~1453)이었습니다. 백 년이 넘도록 지속된 전쟁으로 넓은 땅들은 황폐화되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계속되는 세금 탈취로 갈수록 힘들어졌습니다.
오늘은 유럽 중세시대에 100년 넘게 이어졌던 프랑스와 영국간의 백년전쟁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백년전쟁의 발생 배경
첫째는 남부 프랑스 가스코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었습니다. 13세기 중엽 이래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가스코뉴를 보유했습니다. 그러나 양국은 모두 그 같은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여 그 지역의 통치권을 놓고 지속적으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영국 왕은 풍요로운 포도주 산지인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했고, 반대로 프랑스 왕은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영국인의 관섭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영국과 영국 양모의 제일 주요한 소비자였던 플랑드르 직물 도시들 간의 밀접한 유대 관계였습니다. 14세기 초에 플랑드르의 수공업자들이 오랫동안 독점권을 행사하던 귀족 직물상들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번영했던 지역의 하나인 플랑드르 주민들이 귀족과 상위 군주인 프랑스 왕과의 봉건적 관계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플랑드르 주민들의 봉기에 대하여 프랑스 왕은 막대한 규모의 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귀족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영국 왕은 플랑드르 도시들과의 양모 교역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므로 도시 수공업자들을 지원하고 프랑스 왕의 세력을 배척하려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왕조 사이의 상반된 이해관계와 암투 속에서 전쟁이터졌던 것입니다.
셋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필리프 4세의 아들이니 샤를 4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한 것입니다. 프랑스 왕의 가장 가까운 후손은 필리프 4세의 손녀와 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의 아들인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 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양국을 통합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여성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옛 프랑크족의 법률을 내세웠습니다. 대신에 발루아 가문인 샤를 4세의 사촌을 옹립하여 필리프 6세(재위 1328~1350)로 왕위를 계승시켰습니다.
영국은 처음에는 필리프의 계승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337년 가스코뉴에 대한 분쟁이 다시 불붙자 필리프가 가스코뉴 지역을 그의 봉신인 에드워드 3세로부터 몰수하려했습니다. 이에 에드워드 3세가 가스코뉴의 회복뿐만 아니라 외조부로부터의 왕위 계승을 요구하며 대항했습니다.
영토적, 왕조적 적대감이 전쟁을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그 배경에는 기사 제도가 또 다른 원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럽의 지배계급인 엘리트 기사들은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명예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 같은 명예를 위하여 전쟁은 좋은 기회였습니다.
2. 백년전쟁과 잔다르크의 활약
양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는 1346년 크레시 전투였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수적으로 압도적이었으나 영국군의 전략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약 1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데 반해 프랑스는 수천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전투에서도 프랑스는 수적 우위는 점했지만 전략과 지형 등에서 영국군에 압도당하여 번번이 패전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 왕과 영국 왕 사이의 긴 휴전에도 불구하고 기습과 약탈이 수십 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 왕들은 신민을 보호하거나 또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없었으므로 그 같은 파괴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상업로가 끊기고 신용이 사라지자 산업이 쇠퇴했습니다. 프랑스 왕들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이탈리아 상인 은행가들의 재산을 압류했습니다.
절망적인 싸움의 시기에 프랑스를 구원한 것은 샹파뉴 출신의 농민 소녀 잔 다르크(1412~1431)였습니다. 1429년에 이르러 영국과 부르고뉴 동맹군이 파리를 포함한 북부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남부의 관건인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는 샤를 7세였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랭스에서 전통에 따라 왕태자를 즉위시키라는 성인의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잔다르크의 출현에 사기가 치솟은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는 또 다른 승리를 낳았고, 1429년 7월 16일 샤를은 랭스에서 왕위에 즉위했습니다.
샤를의 대관식 이후 잔다르크는 파리의 탈환에 실패했고, 1431년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 팔렸습니다. 영국군은 눈에 가시 같았던 그녀를 마녀로 재판하여,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말뚝에 묶여 화형 했습니다. 잔의 죽음에도불구하고 추세는 이미 반전되어 프랑스가 영국을 해안 쪽으로 다시 밀어붙였습니다. 1450년 포르미니에서 벌어진 전투가 백년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로 프랑스가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3. 백년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은 역국과 프랑스 양국 모두의 정치 구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년전쟁의 결과 양국 모두 왕권이 신장되었고, 이를 통하여 절대 국가로 전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샤를 7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상비군을 창설했습니다. 상비군은 직업군인들로 왕에게 봉급을 받고 충성을 바치고 상시 훈련하며 출정할 수 있는 군대였습니다. 상비군 제도의 출현과 더불어 백년전쟁 말기에 실용화된 대포와 소화기의 출현은 전술의 변화와 함께 왕권 강화 및 봉건 기사들의 몰락을 촉진했습니다. 백년전쟁을 통하여 거의 400년 만에 자국의 영토를 완전히 차지하게 된 프랑스는 강화된 왕권과 더불어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샤를의 후계자 루이 11세(재위1461~1483)는 정략적인 혼인과 여러 전략을 통하여 부르고뉴, 가스코뉴 등의 제후령을 흡수하여 절대왕정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영토를 상실한 영국은 왕가와 귀족들 사이에 전개된 30년간의 장미전쟁으로 많는 귀족들이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시키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헨리 7세(재위 1485~1509)가 영국의 절대왕정 시대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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