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전개 과정, 아프리카 쟁탈전

수촐스 2022. 4. 13. 15:21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전은 16세기부터 시작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세계지도를 보면서 왜 아프리카 나라들은 국경이 자로 잰 것처럼 반듯반듯할까?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학교에서 세계 역사를 배우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죠.

 

오늘은 서구 열강들의 19세기 아프리카 침략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 침략 과정

 

1870년 이후의 40여 년 동안 진행된 제국주의적 각축전에서 가장 뚜렷한 쟁탈의 표적이 된 것은 아프리카였습니다. 19세기 초반까지도 유럽의 아프리카 침략은 서부와 남부의 몇몇 해안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850년와 1860년대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탐험가들의 활동은 1874~1877년에 영국의 헨리 스탠리가 대륙을 동서로 횡단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때를 맞춰 내륙으로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불붙은 '검은 대륙'의 분할은 1912년에는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만이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 아프리카 전역을 몇몇 유럽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아프리카 분할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였습니다. 두 나라 모두 19세기 전반에 이미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북부 해안의 알제리는 1830년에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영국은 이보다 먼저 19세기 초에 서부 해안의 시에라리온과 황금해안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본격적인 식민지 확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수에즈 운하의 완성에 의해 급속히 변했습니다. 1869년에 완공된 이 운하는 프랑스 투자가들과 이집트 왕이 공동으로 소유했습니다. 이 운하는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으로서 영제국의 상업적 이익에 긴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개통 이래 영국은 이 운하를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이용했으며, 따라서 누구보다도 운하의 소유와 관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만성적 부채에 시달리던 이집트 왕은 1875년에 재정적 위기를 맞아 운하에 대한 그의 지분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영국 보수당 정권의 디즈레일리 수상은 비상수단을 강구해 급히 400만 파운드를 구하여 이집트가 보유하던 지분을 사들임으로써 프랑스와 공동으로 운하를 소유하고, 이집트 정부의 재정에 깊이 간섭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집트에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되어 1882년에는 무력 저항이 발생했는데, 군사개입을 거부한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무력을 동원한 일시적 점령을 감행했습니다. 이 점령은 곧 장기화되어 결국 2차 세계대전 종식 직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튀니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재정적 위기가 발생해 미묘한 외교적 교섭 끝에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습니다. 이 두 사건 이후 아프리카의 분할은 한층 더 격렬하고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 영국은 곧 이집트 남쪽에 위치한 수단을 정복했으며, 나아가 더 남쪽에 위치한 우간다도 보호령으로 흡수했습니다. 동시에 지금의 케냐에 해당하는 지역을 동아프리카 보호령으로 획득함으로써 영국은 나일 강이 흐르는 전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부분의 서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한 프랑스는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을 잇는 횡단적 영토 확장을 추구했고, 두 나라는 급기야 수단의 파쇼다에서 부딪쳤습니다. 1898년 파쇼다에서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이른바 종단정책을 추구하던 영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는데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한 국내적 분열 때문에 전쟁 발발 직전에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후퇴의 대가로 영국은 사하라 사막과 주변 열대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또한 영국은 우간다와 동아프리카 보호령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독일과 충돌해 이들 지역의 남부에 위치한 상당한 지역을 독일의 보호령으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금광

영국은 남아프리카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이곳에서 금과 금강석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광물 매장지로서의 엄청난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프리카 남단에 내털과 케이프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이 식민지와 북쪽으로 접한 오렌지 자유국과 트렌드 발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네덜란드인들의 후손인 보어인들이 오래전부터 주도권을 잡고 있던 곳으로써, 영국의 종단 정책이 껄끄러운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보어전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영국은 1902년 5월 큰 희생을 치른 승리를 거두었고, 1910년에는 기존의 두 식민지와 보어 전쟁으로 획득한 지역을 묶어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함으로써 카이로에서 케이프에 이르는 종단 축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아프리카 분할에 저마다의 몫을 차지하려고 열심히 뛰어들었습니다. 독일은 영국과 경쟁하고 충돌하면서 동남부와 남서부의 해안 지대에 상당한 크기의 식민지를 확보했으며, 서부에서도 카메룬과 토고를 얻음으로써 새로운 제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이보다는 작지만 현재의 리비아에 해당하는 지역과 동부 해안의 소말리랜드를 획득했고, 벨기에조차도 중앙아프리카에 광활한 식민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오래된 식민 국가인 포르투갈도 이미 1840년에 확보한 앙골라에다 동남부 해안의 모잠비크를 1891년에 추가했으며, 에스파냐도 서북부 해안 지대를 차지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둘러싼 각축전이 전적으로 경제적 동기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는 여전히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를 둘러싼 경쟁은 귀금속을 비롯한 막대한 광물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서아프리카와 콩고에 대한 쟁탈전도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야기되었습니다. 또한 수에즈 운하와 나일 강의 확보에 대한 영국의 결의는 단순한 전략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인도를 비롯해 세계 도처에 산재한 영국의 식민지에 이르는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의 정치가들은 제국주의적 정복을 통해 경제적 불안에 불만을 품은 대중으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불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서 이들은 정치적 우익을 이룸과 동시에 명예로운 정복전쟁과 미개한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와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인종적 우월감과 호전적 심리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정치와 문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는 유럽인들이 발전시켜 온 심리상태, 즉 타 지역을 개화시킬 사명감과 인종적 우월감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인들은 그들이 정복지로부터 취득한 것의 대가로 기독교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곧 유럽의 팽창이 개화의 사명이라는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사고로 발전했습니다. 즉 비유럽인들은 유럽의 정복 없이는 진보하지도 못할 것이며 인간의 권리를 향유하지도 못할 것이다는 생각으로 고착되어 갔습니다. 이와 같은 개화의 사명감과 함께 성장한 것이 인종적 우월감이었습니다. 피부색이 엷을수록 더 예리한 칼을 갖게 된다 라는 신념이 유럽의 제국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했습니다. 군사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인종적 편견은 다른 면에서는 이미 문명화된 사회였던 동양권에 대한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특히 유용하게 작용했습니다.

 

유럽 나라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토착민들을 학살하고 탄압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들을 개화시키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종교를 전파하는 등 발전을 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라며 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은 자신들이 겪은 서구 열강들의 만행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유럽 나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분리한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경선으로 인하여 민족, 종교 등의 이해관계의 대립 등의 문제로 크고 작은 내전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