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유럽에서 인종청소라는 명목 하에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아직까지도 당시의 잔혹함과 무자비한 학살과 관련하여 인류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 책 등을 한 번쯤은 보거나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끔찍하게 대할 수 있는지 분노와 눈물을 흘리며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히틀러 나치당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반유대주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전 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반유대주의는 팽배했습니다. 특히, 그리스교도들은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인 사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에서도 큰 질병, 재난이 발생하면 배후에 유대인들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근현대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면서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으며 이후 세계 경제 대황까지 발생하면서 더욱더 힘들어졌습니다. 이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자본가, 은행가, 고리대금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반유대주의에 더 불을 지피게 됩니다.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나치당에 입당 후 연설에서 반유대주의를 설파해 독일인들이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해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전략적으로 이용했습니다.
히틀러는 <나의투쟁>에서 인간이하의 것들인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 등에 대한 전쟁이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라는 관점을 이미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독일인을 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팽창을 위해 영토를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유대인 학살의 시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나치는 제3 국의 인종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또는 오늘날 인종 청소라고 부르는 계획들을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가을 폴란드를 정복하자 하인리히 힙러는 대량의 인구 이동을 위해 친위대를 지휘했습니다. 독일계 소수민족은 다른 곳에서 제국의 국경 안으로 이동시키고,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동쪽에 있는 특별히 지정된 지역으로 강제 이송시켰습니다. 나치는 잠재적인 저항의 모든 근원을 뿌리 뽑고자 했습니다. 위험한 지식인들로 간주된 크라쿠프 대학의 교수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폴란드인은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수만 명의 유대인은 바르샤바 남부에 있는 루블린 지역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죽음의 군단은 거리와 유대교 회당 앞에서 유대인을 사살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치 군대는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로잡힌 공산주의자 관리들, 정치적 선동가들 그리고 적대적인 민간인들은 모두 투옥되어 고문당하거나 사살되었습니다. 약 550만명의 전쟁 포로들이 사로잡혀 수용소에 갇혔고, 그중 절반 이상이 굶어 죽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나치 군대의 소련 침공 후 바로 뒤이어 아인자츠그루펜(이동 학살 부대) 또는 죽음의 군단이라고 불리는 부대가 소련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1만 1000명의 친위대 부대들과 연합해 신원 확인이 어려운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이 사는 유대인 마을과 소읍들을 습격해 1942년 4월까지 50만 명이상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살육은 가스실이 작동하기 이전에 시작되었고 동부 전선에서의 군사 행동 기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1943년 당시 약 22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습니다.
1941년 여름과 가을 내내 나치 관리들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대량 살상을 위한 계획들을 논의하고 종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구역인 게토를 봉쇄했습니다. 어떠한 유대인도 점령 지역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그해 여름 나치는 한 번에 30~50명을 죽일 수 있는 독가스를 장착한 대형 화물 자동차를 실험했습니다. 이러한 실험들과 가스실들은 독일에서 이미 8만명의 인종적으로, 정신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부적합한 개인(장애인, 동성애자, 이단교인 등)을 죽인 T-4 안락사 프로그램을 진행한 과학자들의 도움으로 고안되었습니다. 1941년 10월에 이르러 친위대는 가스실을 갖춘 수용소를 건설하고 있었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강제 이송시키고 있었습니다. 그중 최대 규모로 개조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자들이라고 불렸던 여호와의 증인과 동성애자 등과 폴란드인, 러시아인, 유대인들, 집시들이 수용되었습니다. 1942년 봄과 1944년 가을 사이에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한 곳에서만 살해되었습니다. 이들을 이동시키기 위한 화물차들은 처음에는 폴란드의 게토들에서 그다음에는 프랑스, 홀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발칸 반도의 국가들 등에서 유대인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시신은 죄수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묻거나 소각로에서 태웠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는 근대적인 대량 학살 체계로서 나치즘의 잔혹 행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그 밖의 희생자들은 단순히 살해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문당하고 두들겨 맞으며 공공연히 처형되었고, 한편에서는 군인들과 구경꾼들이 카메라로 처형 장면을 찍어 사진들을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살인은 특별히 사상을 주입받은 친위대와 아인자츠그루펜만 자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101 예비 경찰 대대 같은 징집병의 집단을 그들의 주둔 도시인 함부르크에서의 임무에서 불러내 점령 영토들로 파견했습니다. 그곳에서 중년층으루 구성된 경찰 부대는 어느 마을에서 하루에 1500명의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사람들의 범위를 지정한다면 어디까지 일까요? 나치의 수뇌부들, 수용소 간부들, 유대인들을 이동시키는데 일조한 사람들만 해당될까요?
유대인들이 옆에서 총살되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방조한 시민들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 최악의 상황을 의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겁에 질려 이를 말리려 나서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치 않았고 증거를 무시하고 자신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닙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 정부들도 일정 부분 나치의 계획에 협조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자발적으로 유대인에게 유대인임을 확인시켜주는 별을 달도록 하고 그들의 이동과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며 강제 이송 요구를 했을때도 이에 협조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410만 명에서 570만 명 사이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발트 해 국가들,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에서 80퍼센트 이상의 유대인 공동체가 절멸되었고, 다른 유럽지역에서도 50 퍼센트에 달했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인종청소를 통해 독일계 소수민족과 자신의 동맹국들을 구해내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새로운 유럽 건설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현재도 전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내전과 전쟁으로 대량 학살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주의로 더 이상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폭력성과 잔인함을 멈춰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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