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1년 주기로 공전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지구를 볼 수도 있고, 달에 착륙하여 직접 조사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구인들이 지구 밖을 직접 나가서 탐험을 할 수 있게 된 지 불과 몇십 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세시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서 입니다. 학교 세계사와 과학시간에 중세시대의 천동설, 지동설에 관해서 모두 배우셨을 텐데요. 오늘은 중세 17세기 갈릴레이의 우주론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중세 우주론과 코페르니쿠스 주의
중세 우주론은 고대 문헌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100~178)가 다듬고 체계를 잡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저작에 의존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초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사상에 의존했습니다. 이 전승된 우주론에 따르면 하늘은 주도면밀하게 조직된 천구들의 체계로 지구를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습니다. 지구와 천체는 근본적으로 달라 상이한 물질로 이루어졌고, 서로 다른 운동의 법칙을 따릅니다. 천체 중에서 행성들과 별들이 완전한 원형을 그리며 정지해 있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된 우주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고 이 믿음을 확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16세기 초 무렵에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는 기존 사용하고 있었던 로마식 달력의 허점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폴란드 교회의 직원이자 천문학자였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였습니다. 폴란드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은 코페르니쿠스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천문학, 교회법,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가 수학적 계산에 입각해 제시한 해결책은 단순하면서도 급진적인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프톨레마이오스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즉, 지구는 정지해 있는 것도 아니며 태양계의 중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지구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다른 행성과 더불어 태양 주위의 궤도를 돈다는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물리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뒤엎기보다는 다듬으려 했지만, 그러한 물리학과 자신의 새로운 태양 중심적 우주 모델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새로운 문제와 모순을 초래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직전인 1543년에야 <천체 회전에 관해>를 출간되었습니다. 당시 코페르니쿠스 사상은 실제적인 수학적 가설이 아니라 유용한 도구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2. 갈릴레이의 지동설
갈릴레이는 망원경의 발명으로 유명해졌습니다. 1609년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이는 작동을 확인하기 위해 처음에는 지상의 사물 관찰을 시작으로 이후부터는 멀리 있는 밤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이는 달을 관찰하면서 산맥이나 평야 등 지구와 유사한 풍경들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관측은 천체가 지구와 닮았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지구와 본질적으로나 필연적으로 다른 천상의 불변하는 완벽한 천구로서의 하늘이라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성 궤도를 선회하는 달을 보았는데, 이는 지구가 모든 궤도의 중심이 아니라는 증거였습니다. 또한 그는 태양의 흑점을 보았습니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관측한 결과를 처음에는 <별의 사자>(1610년)라는 제목으로, 1613년에는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로 출간했습니다.
17세기의 과학자들은 막강하면서도 부유한 후원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당시에 토스카나의 메디치 가문은 다른 가문들처럼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후원하면서 그들의 업적을 통해 가문의 명성을 빛나게 하고 권세를 보강했습니다. 파도바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갈릴레이는 더 자유롭게 연구를 하기 위해 메디치가의 가정교사가 되어 후원을 받았습니다. 갈릴레이는 <별의 사자>를 메디치가에 전해주었으며 새로 발견한 목성의 달들을 '메디치가의 별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데 메디치의 최고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제 이탈리아의 권력과 후원 네트워크에 제대로 자리 잡은 갈릴레이는 천문학에 관한 자신의 연구와 행성 체계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모델이 옳다는 신념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레이의 이러한 추구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이 가톨릭교회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모든 천체는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천동설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도 회전운동을 한다는 이론으로 이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학설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다른 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갈릴레이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에 그 궁정 수학자가 이단을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닌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주변 분위기에 불안함을 느낀 갈릴레이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1615년 후원자인 코시모의 어머니 대공녀 크리스티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에서 갈릴레이는 누구나 진지한 코페르니쿠스주의자와 신실한 가톨릭교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성서를 가르치고 영혼을 구원하는 신성한 일을 해왔다고 언급했습니다. 물리적 세계의 작동에 대한 설명은 관찰과 수학에 토대를 둔 자연철학자가 더 잘할 수 있도록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어려운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성서의 복잡다단함을 자연철학의 새로운 결론과 조화시키는 것은 교회 신학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논쟁에서 교회가 어느 편을 드는 것은 불필요하기도 하고 위험부담도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 권위와 신뢰성에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자연철학자와 신학자를 진리 탐구와 동반자이긴 하지만 매우 상이한 역할을 하는 동반자로 묘사했습니다.
1616년 종교재판소는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터무니없으며 공식적으로이단적이다' 라는 명제를 결정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천체의 회전에 관해>를 금서목록에 두는 칙령이 공표되었으며,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 주의를 가르치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633년 종교재판소는 1632년에 출간된 갈릴레이가 쓴 <대화편>의 판매를 금지하고 갈릴레이에게 재판정에 설 것을 명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이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입장을 참회하도록 강요했고, 연구를 계속하거나 심지어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논하는 것도 금지하면서 종신 가택연금에 처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이의 연구를 단념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초기에 연구했던 운동의 이론을 다음었습니다. 그는 사물의 운동은 외부의 힘이 그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초창기 관성 이론을 내놓았으며,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 사물이 거의 동일한 속도와 균일한 가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계산해 냈습니다. 갈릴레이는 사물의 운동은 규칙적인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구 상에서 사물의 운동을 지배하는 동일한 법칙은 하늘에서도 관찰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자 우주의 태양 중심 모델에 입각한 물리학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갈릴레이는 비록 결론적이지는 않더라도 코페르니쿠스적인 우주론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또한 천체운행의 보편적 법칙을 제안하기 위해 발견, 관측, 실험, 수학 등을 결합시켰습니다. 하지만 그의 유산 가운데에는 분명히 그가 피하기를 바랐던 종교화 과학 사이의 불화가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자연철학은 전반적으로 신학적 진리, 종교적 믿음이나 교회의 권위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갈릴레이의 재판으로 남부 유럽에서 코페르니쿠스 주의 적 주장들은 침묵했고, 교회의 지도력은 보수 반동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과연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아직도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주 많고, 가보지 못한 곳이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 뒤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고, 맞다고 생각하는 이론들이 모두 잘 못됐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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