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삼국시대를 이끈 백제, 고구려, 신라.
그중에서도 백제는 한성을 거쳐 웅진, 사비로 두 번의 천도를 했습니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던 한성(지금의 서울)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인하여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이 살해되면서 불가피하게 고구려를 피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됩니다. 그 이후 더 큰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 넓은 벌판 지형의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면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게 됩니다.
이 중 오늘은 백제의 중흥을 이끈 웅진시대 무령왕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웅진, 현재 충청남도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의 무덤 무령왕릉은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입니다. 현재 공주지역과 부여지역의 백제 유적지들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령왕
백제의 25대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은 백제 웅진시대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를 다시 중흥으로 이끈 중입니다. 백제한성시대때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남하할 당시에 왕권은 매우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동성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진압했습니다. 그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왕족을대폭 등용하여 지방 통치의 거점인 담로에 파견하며 지방 통제력도 강화하였습니다. 아울러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농민경 제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무령왕은 대내적인 정치, 경제적 안정을 우선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고구려에 대해서 공세적 입장을 취하면서 512년과 52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영동장군' 이라는 명예 작호를 받았으며 513년과 516년에는 왜에 오경박사를 보내 유교 경전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 천도 30년이 지난 무령왕대는 그동안 길러 온 경제력과 군사력으 기반으로 국력을 신장하였으며, 대외 문화를 적극 수용하거나 전파하면서 국력을 과시하였습니다.
2. 백제 중흥의 상징 무령왕릉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웅진 시대 백제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약 2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웅진시대 백제의 무덤 양식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보듯이 돌방 무덤과 벽돌무덤이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연꽃무늬가 있는 벽돌로 석실을 쌓고 천장을 터널식으로 만든 벽돌무덤입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무덤 양식을 백제의 양식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웅진시대 왕 또는 왕족들의 무덤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남북 4.2m, 동서 2.72m, 높이 2.93m의 무덤방에는 남쪽을 향해서 동쪽에 왕, 서쪽에 왕비의 시신을 두었고, 그 앞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의 진묘수와 함께 토지신에게 무덤으로 사용할 땅을 샀다는 증명인 매지권이 있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된 다수의 장신구가 출토되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관장식을 비롯해서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머리뒤꽂이, 허리띠 그리고 그 외 갖가지 장식용품을 수습했습니다. 이는 왕과 왕비의 무덤이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착용했던 물건을 함께 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국보 제154호인 무령왕 관 꾸미개입니다. <삼국사기>에 백제 왕의 공식 옷차림에 관련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왕의 꽃장식 즉, 관 꾸미개에 대한 설명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는 왕의 관 꾸미개 2점과 왕비의 관 꾸미개 2점, 총 4점의 관 꾸미개가 수습됐습니다. 크기는 약 30센티미터 정도이며 디자인 면에서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금으로 된 관 꾸미개를 검은 비 단관(오라관)에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귀족들도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다시 그 겉에 신분을 나타내는 장식을 덧붙였습니다. 다만 귀족들은 은으로 만든 장식을 붙였습니다. 그것도 16개의 관등 중에서 6품 이상의 고위 귀족만 은장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제의 크기도 더 작고 디자인도 단순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재질뿐만 아니라 크기나 디자인에서도 왕과 귀족의 관꾸미개는 차이가 났습니다.
초기에 웅진백제기에는 왕권이 그리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왕들이 살해되는 비극이 수차례 걸쳐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무령왕에 이르러서는 왕의 권위를 완전히 회복했고, 그 위세를 나라 밖으로 떨칠 정도였습니다. 그런 무령왕의 무덤에 왕의 위세를 보여주는 위세품이 함께 들어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
무령왕릉에 남아 있던 위세품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위세품은 칼입니다. 무령왕이 살아생전에 누렸던 권력이나 위엄을 상징하는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칼은 손잡이 끝부분에 고리가 붙어 있어 둥근고리큰칼이라고 부릅니다. 둥근고리큰칼은 출토 당시에 무령왕의 왼쪽 허리 부근에 놓여 있었습니다. 둥근고리큰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손잡이 끝, 즉 둥근고리의 장식입니다. 고리 안에는 여의주를 문 한 마리의 용이 표현되어 있고, 고리 밖에도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게다가 머리 벼슬과 뿔, 비늘까지도 아주 세밀하게 세공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손잡이 부분에도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감아 백색과 금색의 조화로움을 가미했고, 위아래로 봉황무늬와 인동무늬를 교대로 배치해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입니다.
이 장식품들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입니다. 삼국시대 백제는 문화적으로 매우 융성하고 가장 화려한 기술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무령왕릉에는 그런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많이 묻혀 있었습니다. 금제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금제 장신구 일부는 누금세공 기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기법은 금속의 겉면에 가는 금실이나 금 알갱이를 붙여서 아주 섬세하게 무늬를 넣는 방식입니다. 이 시기의 금속공예품은 보통 끌을 이용 해서 금속을 깎아 모양을 만드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는데, 누금세공은 이런 방식에 비해 한 차원 높은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금세공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의 금속공예가 기술적으로 발전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고급 공예 기술이 반영된 유물이 무령왕릉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제가 외적으로 군사력이강성해진 것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안정되고 각종 문화 역량을 증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무령왕은 재위 기간에 고구려와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해서 다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는 대가야를 공격해 섬진강 하구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1500년 동안 도굴되지 않고 온전한 채로 발견된 무령왕릉을 처음 발견했을 때 대한민국의 많은 학자들과 기자 그리고 더 나아가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장마철로 비가 많이 오고 있는 궂은 날씨가 계속되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날씨의 악조건과 전국 매스컴의 집중조명은 미흡하고 급한 발굴조사로 이어졌습니다. 무령왕릉 발굴을 담당한 김원룡 박사는 발굴 당시의 주변 상황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회고하는 내용을 글로 쓰기도 했습니다.
무령왕릉 발굴에 조금 더 신중을 기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들이 백제에 대해서 그리고 무령왕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고고학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온전한 왕릉을 발견하는 것은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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